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맨체스터 시티 FC (문단 편집) === 맨체스터 시티의 창단과 짧은 리즈 시절 === 1880년, 잉글랜드 맨체스터의 고튼 서부에 위치한 세인트 마크스 교회 (St. Mark's Church)의 교인들이 다분히 인도적인 목적으로 훗날 맨체스터 시티로 알려질 축구 클럽을 창단했다. 당시 많은 실업자와 범죄자들이 맨체스터 동부, 특히 고튼에 만연해있었는데 현지인들을 위한 새로운 활동을 도입함으로써 이것을 개선하고 사회적 병폐를 줄이라는 아서 코넬 (Arthur Connell) 목사의 독려에 따라 교회 관리인인 윌리엄 비스토우 (William Beastow)와 토마스 굿비히어 (Thomas Goodbehere), 그리고 아서 코넬 목사의 딸인 안나 코넬 (Anna Connell)이 '''세인트 마크스 웨스트 고튼''' (St. Mark's West Gorton) 라는 교회 축구 팀을 창단한 것이다. 특히 안나 코넬은 '''19세기에 창단된 프로 축구팀 가운데, 창단 멤버 중에 유일한 여성'''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게다가 안나 코넬이 창단에 큰 기여를 했는데 원래는 [[크리켓]]이나 [[럭비]] 팀을 만들려고 했는데 당시 지방 음주 노숙자라든지 여러 사회 문제가 된 알코올 중독자를 위한 스포츠로 두 종목은 맞지 않는다며[* 아닌 게 아니라 이전에 있던 다른 교회 크리켓 팀에서 크리켓 배트로 상대방을 두들겨 패고 패싸움이 벌어졌었고, 럭비팀에서도 공은 내팽개치고 사람을 들이받아 싸우기 일쑤였다고...] 축구팀을 만들자고 건의한 게 그녀였다고 한다.[* 2016년 9월호 베스트 일레븐 지 출처.] 1884년, 세인트 마크스는 고튼의 또 다른 축구 클럽인 고튼 애슬레틱과 합병되지만 불과 한 시즌 뒤에 세인트 마크스는 고튼 AFC로, 고튼 애슬레틱은 웨스트 고튼 애슬레틱으로 분리되었다. 1887년에 연고지를 맨체스터 시 동부에 위치한 아드윅이란 동네로 옮겨 클럽 이름을 아드윅 AFC로 바꾸고, 홈 구장도 하이드 로드로 옮기게 된다. 1889년에는 하이드 로드 근처의 탄광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나 23명의 광부가 사망하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고, 아드윅 AFC와 뉴턴 히스(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가 지역 주민들을 돕기 위한 기금 마련 자선 경기를 치르기도 하였다. 1892년 잉글랜드 축구 2부 리그가 설립되어 아드윅 AFC가 창립 멤버로 참가했다. 1894년에는 팀 이름을 '''맨체스터 시티 FC'''로 바꾸고, 1898-99 시즌에서야 드디어 1부 리그로 올라왔으나 다시 2시즌도 안 가 강등당했다. 그러다가 1시즌 만에 승격함과 동시에 다음 해인 1903-04 시즌 [[볼턴 원더러스 FC|볼턴 원더러스]]를 꺾고 [[FA컵(잉글랜드)|FA컵]] 우승과 리그 2위의 성적을 거두며 이름을 알리는가 했지만 오래가지 않아 또다시 강등과 승격을 거치며 중소 구단으로서 지내야 했다. 그 와중에 1923년 홈구장 하이드 로드가 불에 타버려서 메인 로드로 경기장을 옮기기도 했다. 1925-26 시즌에는 감독 없이 FA컵 우승을 하기도 하고, 맨유 원정에서 6-1로 이기기도 했지만 강등당한다. 1928년에는 최고의 서포터즈를 가진 클럽으로 선정되기도 했고 1934년 FA컵 우승, 라이벌인 맨유가 첫 리그 우승(1907-08 시즌)을 거둔 지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서인 1936-37 시즌에서야 맨시티도 첫 리그 우승의 감격을 누린다. 하지만 1937-38 시즌, 리그 42경기에서 80골이나 넣는 공격력을 보유하고도 77실점이나 허용하는 수비진 탓에 강등당했다. 결국 맨시티는 지금까지 다음 시즌에 강등된 유일한 디펜딩 챔피언이자 실점보다 높은 득점(+3)을 기록하고도 강등된 유일한 팀으로 남는다. 그래서 1951년에 전쟁포로 독일인 골키퍼 [[베르트 트라우트만]]을 전격 영입하고, ~~타 팀의 어그로와~~ 수비를 강화하면서 다시 상승하기 시작했다. 승격과 강등을 거치면서 1955년에 FA컵 결승전에서 뉴캐슬에게 패해 우승컵을 내주지만, 1년 후 다시 결승에 진출해 우승한다. 1958년 '''[[뮌헨 비행기 참사|뮌헨 참사]]'''에서 맨시티의 골키퍼였으며 기자로 활동하였던 프랭크 스위프트[* 맨시티 역대 키퍼 중 [[베르트 트라우트만]] 다음 두 번째로 뛰어났다고 꼽히는 레전드 키퍼이다.]가 목숨을 잃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